지나간 바람_이희정(안양예술고등학교)

강은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섰다. 빨간색 신호등은 한 발짝이라도 내딛 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강렬하게 빛났다. 이미 약속시간은 꽤 지난 시 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록불로 바뀌었지만 강은 건너지 않았다. 그렇게 강은 몇 번의 초록불을 흘러내리기를 반복했다. 발밑에는 누렇 게 변색된 벚꽃잎이 모래알처럼 모여있었다. 강은 그 꽃잎들을 지그시 밟으며 다음 신호등을 기다렸다. 그때 강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 다. 전화였다. 강은 머뭇거리다가 체념하듯 통과버튼을 눌렀다. 시끌벅 적한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야, 너 왜 안 와?”
 “아니야, 거의 다 왔어.”
 “빨리 와. 여기 완전 웃겨. 애들 얼굴이 고딩 때와 싹 달라.”

강은 묻고싶은 게 있었지만 통화는 이미 끊어졌다. 윤도 왔어? 미리 묻지못한 질문은 변색되어 길가에 눌러붙었다. 초록불이 다시 켜지자 강은 힘없이 발을 내딛었다. 하얀 선과 검정 아스팔트로 이뤄진 횡단보 도를 빨강과 초록으로 나뉜 신호등의 규칙을 따라. 그 이분법적인 세계 속에서 강은 묵묵히 앞을 향해 갈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뒤처지거나 벗 어나면 횡단보도 옆에서 빛나는 헤드라이트가 금방이라도 자기를 잡아 먹을 것 같았다. 밑만 보고가던 강은 도로 한 가운데에 떨어진 물체를 보았다. 그건 무지개 깃발이었다.

화로에 구운 통삼겹살, 강의 동창회 장소였다. 문을 열자 기름 밴 고 기 냄새가 물씬 피어올랐다. 식당 구석에서 강의 이름을 부르는 무리 가 있었다. 넌 진짜 안 변했다, 오랜만이야라는 둥의 겉치레 인사를 끝 내고 강은 자리잡아 앉았다. 흘깃 식당 안을 돌아보았으나 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느덧 4년째였지만 반 아이들 의 이름은 선명히 떠올랐다. 다만 달라진 얼굴에 이름을 매치하기가 힘 들 뿐이었다. 동창들은 취업과 대학에 대한 근심이나 푸념을 늘어뜨렸 다. 그러던 중 다른 화제가 떠올랐다. 어제 낮에 있었던 축제에 관한 것 이었다. 강 역시 그 축제를 멀리서 구경했다. 교보문구에 들리려다 우 연히 접한 것이었다. 무지개 문양이 그려진 깃발을 높이 들고 자신들의 권리를 외치던 이들. 그리고 경찰차벽 너머로 그 권리를 반대하는 기독 교 단체의 대립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강은 그 장소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그건 자신이 지금껏 받아들였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강은 횡단보도 가운데에 버려져 있던 깃발을 떠올렸다. 강은 그것조차 집을 수 없었다. 강은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반장은 그런 강 앞에 앉아 화제를 끌만한 얘기를 생각했다. 반장은 손바닥을 짝 치며 강에게 물었다.

  “맞아, 너 윤이랑 친했지. 윤과 아직 연락해?”
강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맥주만 홀짝였다. 시큼한 탄산맛이 입 안에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그때 가게 문이 열렸다. 강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윤이라는 것을. 학창시절 때 숏컷으로 잘랐던 머리가c 허 리까지 긴 생머리가 되고, 화장기없던 얼굴에 분홍색 아이섀도가 발라졌지만 강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강은 윤이 자신을 알아채지 못 하도록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뒷문으로 나갔다. 취기가 도는 탓인지 얼 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동창회에 나간다고 수락했을 때부터 쉼없이 이미지트레이닝을 했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할 수 있도록.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란 걸 상기시키며.

윤과 강은 한 가지에서 피어난 벚꽃처럼 늘 붙어다녔다. 비록 고3, 마지막 1년에 만난 사이였지만 만나지 못했던 18년 동안의 빈 공간을 메꾸기라도 하듯 항상 같이 있었다. 강이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위로 해준 이도 윤이었으며, 윤의 등급을 3등급이나 끌어올려준 이도 강이 었다. 강은 윤이랑 함께 있으면서 마치 민들레 홀씨가 자기 가슴에 들 어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간질거리는 그 느낌이 싫진 않았다. 씨가 묻 히면 꽃이 피어나듯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강은 느꼈다. 그날, 가로등 밑에서 서로 껴안는 걸 강의 아버지에게 들키지만 않았어도.

강은 아직도 그 당시의 감각을 선명히 기억했다. 종아리에 빨갛게 그어 지는 선의 날카로움. 자신을 바로보는 가족들의 눈빛과 눈을 감고 인자 하게 웃고있는 마리아상. 콧속을 알싸하게 맴도는 할머니의 계피차 향. 그러나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건 울며 강을 끌어안던 엄마의 속삭임이었다.
 “괜찮아, 그건 그냥 지나가는 감정일뿐야. 바람처럼 지나가는 거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강의 속에 피어났던 민들레는 바람에 꺾이고 말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달궈진 강의 얼굴을 식혀주었다. 강은 담개비 하나를 꺼내 불을 지폈다. 녹슨 경첩이 쇳소리를 내며 뒷문이 열렸다. 강은 하 마터면 입에 물고있던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윤이었다. 윤은 어색하 게 웃으며 말했다. 담배 피네? 강은 별다른 대꾸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둠 속에서 담배 불빛만 빛났다. 윤은 입을 열었다.
 “네가 나 피하는 거, 나 때문이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입을 뗐지만 목구멍이 턱 막혔다. 윤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미안해.”
  “뭐가?”
 “그냥 다.”
윤을 돌아보았을 때, 윤은 이미 가게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강은 윤 의 사과를 되새겼다. 뭐가, 라는 의문은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들의 감 정이 누군가가 미안해야 하던 일이던가. 강은 윤이 과거에 해주었던 이 야기를 생각했다.
 “무지개는 비바람이 갠 후 화창한 날씨에 나온대. 그러니까 비바람이 있어야 무지개도 있는 거야.”

강은 눈을 감았다. 그 비바람을 넘어섰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그러 나 폭풍우의 상처는 아직도 강의 종아리에 남아있었다. 담배 연기는 어 두운 하늘을 향해 퍼져갔다. 그들이 꿈꿨던 바람은 이미 멀리 지나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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