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특정 사회에서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가늠해보기란 쉽지 않다. 소득, 나이, 학력, 성별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 ‘불편한’ 작업이기도 하다. 때로는 자신이 특권층에 속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동양인이자 한국 여성으로서 필자는 가장 차별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반면, 어쩌면 한국사회에선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여성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언젠가 북한이탈주민과 진행한 인터뷰를 듣고 나서 든 생각이다. 인터뷰 막바지에 탈북자들이 한국사회를 경험하면서 느꼈던 계층인식을 엿들을 수 있었다. 한 탈북인 여성은 스스로를 ‘못 배우고 촌스러운 북한여자’, 반대로 남한여성은 ‘고등교육까지 마친 세련된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비교했다. 탈북 여성으로서 그녀가 느꼈던 탈북 여성에 대한 편견 혹은 남한여성과의 이질감에서 오는 개인적인 소회였을 것이다. 다만 ‘남한 여성’인 나로선 그런 인식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도 내가 누군가에게 이 사회의 특권층으로 비춰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반여년 동안 여성학 이론을 접하면서 느낀 점은 한 사회에서 구성원 범주를 나누는데 있어 이렇듯 다양한 여건을 고려한 ‘세분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여성학 이론에선 모든 여성을 연대와 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단순화하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페미니즘 진영의 ‘주류’라고 믿는 주장들이 실은 ‘서구의 백인 중산층 이상의 교육받은’여성들의 목소리에서 출발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이 주장한 페미니즘 이론에 대해 적극적인 수정이 요구된 것 역시 유색인종, 사회빈곤층, 성 판매 여성과 같은 다른 범주의 의견을 대변할 수 없음이 지적받은 때부터다. 이는 비교적 최근 일이며 현재에 와서는 많은 여성학자들이 ‘여성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여성해방이라고 주장한다. 그동안 여성학이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관계를 논의하는 이론이라고만 생각해왔던 나로선 적잖이 놀라운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여성학 이론은 단순히 성별관계 뿐 아니라 여성들이 처한 모든 정치적 현실, 즉 민족, 국가, 계급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편견과 달리한다. 갈등은 필연적일 것이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여성주의가 제기하는 여러 의문에 대해 곱씹어보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을 빌려 ‘안다는 것은 결국 상처받는 일인 동시에 축복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이수민(역사문화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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