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

 

지령 제1337호(2017년 9월 18일 자)에서는 개인적으로 ‘어덜키드(Adultkid),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들’이 가장 흥미로웠다. 우선 어덜키드란 용어가 궁금증을 자아냈다. 시의성 있는 소재의 참신함도 좋았지만, 문제의식이 더욱 돋보였다. 기사는 독자가 어덜키드 현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를 익히 알고 있거나 그 문화를 직간접으로 경험한 독자인 경우 다소 피상적인 취재 방향에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해당 기사는 여러 실례를 들어 어덜키드 현상을 설명함으로써 용어 자체가 낯선 독자를 배려하고 있다. 문제는 기사의 논조다. 자칫 어덜키드 현상을 옹호하는 시각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세상, 장난감 왕국을 다녀오다’, ‘어덜키드,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허물다’와 같은 중간 제목만 보더라도 그렇다. 기사는 곧이어 ‘어덜키드 현상, 아이들을 병들게 하다’라는 중간 제목을 앞세운 후 그 문제점을 지적한다. 전반부의 내용과 배치되는 논조다. 독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전문가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어덜키드 현상의 부작용을 지적한 점은 탐사 보도의 신뢰성과 관련하여 칭찬받아 마땅한 대목이다. 하지만 ‘동료 그룹 간 형평성 문제’와 같은 문제점 지적이나 해결책으로 제시한 어른의 역할 강조는 전문가 인터뷰 내용치고는 상식적인 진단이다. 어덜키드 현상이 기업들의 치밀한 마케팅 전략의 산물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해당 기사는 이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어덜키드 현상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비판 없이 사실의 엄정한 기술만으로 기사는 충분조건을 갖출 수 없다. ‘어덜키드,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들’은 그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기사였다.

독자위원 김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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