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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헌황귀비

기사승인 2018.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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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명의 사람들]

숙명여대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인 순헌황귀비(1854-1911)는 영월 엄씨다. 백성들이 흔히 ‘민비(명성황후)’와 구별하여 ‘엄비’ ‘엄귀비’ 등으로 불렀다.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만 다섯 살 때 입궐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 됐고, 나라가 무너지는 험난한 시대에 고종을 섬기면서 황귀비라는 당대 여성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시호는 ‘순헌(純獻)’이다.

1894년 6월, 일본은 김홍집 내각을 앞세워 갑오개혁을 추진했는데, 그 결과 왕권이 약화되고 간섭이 심해졌다. 민비가 러시아 세력과 손잡고 견제하자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낭인들을 시켜 무참히 시해했다. 고종은 그 후 연금 상태에 놓여 일제의 삼엄한 감시 아래 불안에 떨었다. ‘엄상궁’은 그때 임금을 안전하게 모시는 일을 도맡으면서, 1896년 2월의 아관파천(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에 핵심 역할을 했다.

다음 해 환궁한 고종은 광무개혁을 단행, 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열었는데, 그 8일 후에 순헌황귀비는 황제의 일곱째 아들 영친왕 이은(李垠)을 낳았다. 이로써 귀인에 책봉되고 왕을 지키는 세력의 중심적 존재로 부상했다. 왕비의 자리가 빈 상황에서 1900년에 순빈, 다음 해에 순비(淳妃), 그 다음 해에는 황귀비로 책봉됐다. 후궁이면서도 왕비와 같은 궁궐 내 최고 지위의 여성이 된 것이다.

19세기말~20세기 초에 위태로운 나라를 건지기 위해 교육구국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순헌황귀비는 적극 나서서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 등을 설립하거나 후원했다. 한국인이 세운 여학교가 드문 시대에 친정 조카인 육군참장 엄주익을 시켜 1906년 5월에 설립한 명신여학교가 바로 숙명여자대학교의 모태이다.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했던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가 내린 황실의 보조금과 토지를 기본재산으로 운영됐고, 1909년에 이름이 ‘숙명고등여학교’로 바뀌었다. 영국과 일본의 귀족여학교를 본보기 삼았으므로 황귀비는 황실 행사 때마다 학생을 참여시키고 상도 내렸다. 이 학교 재단은 황실의 계속된 후원과 거국적인 모금운동에 힘입어 1939년 용산구 청파동에 숙명여자전문학교를 개교했고, 이는 해방 후 숙명여자대학이 되었다가 1955년 종합대학교로 승격, 여성 엘리트 교육의 본산이 됐다.

1907년 7월, 일제에 의해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명성황후 소생)이 황제가 됐다. 8월에는 황귀비의 아들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됐다. 그러나 넉 달 뒤, 열한 살의 황태자는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44세에 뒤늦게 얻은 하나뿐인 자식과 헤어진 순헌황귀비는 상심이 컸고, 그것은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더 깊어졌다. 1911년 7월 20일, 황귀비는 일본에서 보낸 활동사진 속에서 황태자가 고된 군사훈련을 받으며 주먹밥 먹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 그리고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세였다.

순헌황귀비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근대 여성교육에 앞장선 여성 리더이다. 역사가들은 “근대적 여성교육에 힘쓴 선구자”(한희숙), “당대의 여걸”(송우혜) 등으로 평했다.
 

최시한 숙명역사관장

 

숙대신보 shinbosa@sm.ac.kr

<저작권자 © 숙대신보 모바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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