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의 사람들(4)]

최승희(崔承喜 1911-1969)는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기를 관통하여 극적으로 살았던 ‘시대적 인물’이자 ‘스타’다. 그녀는 무용가, 배우, 가수, 모델인 동시에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최승희는 1911년 서울의 양반가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량인 아버지는 일제가 조선을 지배·수탈하기 위해 실시한 토지조사사업 때 재산을 잃고 몰락했다. 그녀는 1922년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 후 갑반생으로 졸업했다(17회).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학교에서 동경의 음악학교 진학을 후원하기로 했지만 나이가 모자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일본의 근대무용가 이시이 바쿠가 경성에서 공연했는데, 뒤에 영화 제작자가 된 큰오빠 최승일의 권유에 따라 그녀는 공연단과 함께 동경으로 가게 된다. 일반 여자가 대중 앞에서 춤을 추는 일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15세의 가난한 식민지 소녀가 무용을 배우기 위해 현해탄을 건넌 것이다. 그런데 이 소녀한테 놀라운 일이 계속 일어났다.

무용을 배운지 불과 1년 후, 서울에 다시 온 이시이 바쿠 공연단에서 최승희는 독무를 출 정도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지의 공연에서 점차 스승의 대역을 맡았다.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3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무용연구소를 차리고 전통 무용을 근대화한 <영산춤> 같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반봉건 상태의 당대 현실에서 ‘몸으로 하는 여성의 내면 표현’은 질시와 소문 거리가 될 따름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는 카프 계열의 문학평론가 안막(1910- ?)과 결혼한다. 그리고 남편이 사상 문제로 검거되는 등 어려움이 닥치자 동경의 이시이 바쿠 무용단으로 돌아간다.

최승희는 키가 커서 춤이 활달해 보이는 한편 섬세한 육체적 매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녀의 무용은 한국 전통춤과 서구의 발레를 결합한 혁신적인 것이었다. 또 그녀는 무대 연출에 뛰어나 현란한 무대의상을 디자인하고 조명 전문가를 데리고 다녔다. 대중의 인기가 치솟자 그녀는 <반도의 무희> 등 영화에 출연했으며, 광고와 패션모델로도 활약했다. 그녀의 상징인 단발머리가 유행하던 1937년, 숙명여고보의 여자전문학교 설립 모금운동이 벌어졌을 때 그녀는 동문회 ‘숙녀회’ 주관으로 경성 부민관에서 특별공연을 열어 입장료 전액을 모교에 기부했다.

그녀는 국외로 눈을 돌려 1938년부터 당대 최고의 흥행사들과 손잡고 미국, 유럽, 남미 등에서 종횡무진 공연을 펼쳐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일본군의 후원과 위문 공연에 자주 동원됐는데, 그 때문에 그녀는 후일 <친일인명사전>에 오른다. 

최승희의 가족은 중국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녀는 인천으로 귀국하지만 월북하여 뒤에 북한의 인민배우가 되고 남편은 문화선전성의 부상이 된다. 그러나 1958년 숙청 때 남편이 체포되고 그녀 역시 연금 상태에 빠져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민족의 불행을 피할 수 없었던 이 천재 예술가는, 남한에선 1988년 해금되어 비로소 논의가 자유로워졌고, 북한에선 2000년경에야 명예 회복이 이뤄졌다.

                          최시한(숙명역사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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