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노화’를 삶의 일부로 수용하고 있을까? 지난 8월 27일(화)부터 10월 20일(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에이징월드(Ageing world):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는 노화를 삶 바깥의 요소로 간주하는 현대 사회를 세 가지 주제로 나눠 전시한다. 전시 ‘불안한 욕망’에선 신체적 나이 듦에 저항하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했고, 전시 ‘연령차별주의 신화’에서는 나이를 근거로 차별하는 연령차별주의 지적, 전시 ‘가까운 미래’에선 고령화 사회에 적응한 미래 예상을 다룬다.
전시를 통해 노화를 배척하는 세계와 직면한 관객들은 노화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을 극복할 방안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노화를 두려워하는 우리의 불안과 마주할 수 있는 세계인 ‘에이징 월드’ 속으로 들어가 보자.


노화를 거부하는 사람들
젊음을 잃어가는 몸은 노화의 당연한 과정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름진 피부와 약해진 건강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노화를 막기 위해 애쓴다. ‘늙지 않는 삶은 없다’는 당연한 명제는 백세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불안이 됐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가능한 한 젊은 상태로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연선홍 서울시립미술관  도슨트(Docent)는 “전 세계적으로 노화를 방지하기 위한 산업 규모가 약 200조 원에 달한다”며 “자본주의사회에서 노화를 극복 혹은 치료의 대상으로 여기는 시선에 대해 비판적인 교훈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에이징 월드에서도 노화를 피하려는 욕망을 담은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윤지영 작가의 ‘오죽 -겠, -으면’은 관람객이 안마의자에 앉아 짧은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독특한 체험형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의 내용에선 건강을 원하는 행동이 오히려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는 상황을 다룬다. 건강에 극도로 예민한 다큐멘터리 속 주인공은 만병의 원인이라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 노력한다. 처음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혈 자리를 누르는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사원에 찾아가 건강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거나 무한의 신을 찬양하며 노래 부르는 등 그의 행동은 점차 강박적으로 변해간다. 이때 안마의자가 작동하며 관람객의 몸을 주무르는데, 이는 주인공처럼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해봄으로써 다큐멘터리에 더욱 이입하게 만드는 장치다. 띄어쓰기를 달리하면 ‘오, 죽겠으면’으로, 띄우지 않고 읽으면 ‘오죽했으면’으로 읽히는 작품 제목은 ‘오죽 죽겠으면 저럴까’라는 관람객의 공감을 이끌기도 한다. 이 작품은 무병장수를 꿈꾸는 욕망에 비해 신체는 유한하고 유약하기에 욕망과 신체적 한계의 간극을 채우려는 노력이 허황된 강박은 아닐지 돌아보게 한다. 관람객 신주형(남·50대) 씨는 “백세시대라고 해도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며 “전시를 관람하며 ‘후회 없이 삶을 즐기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스페인과 캐나다 출신 두 작가가 모인 ‘커먼 어카운츠(Common Accounts)’팀의 ‘유동체가 되어: 아늑한 성전(聖戰)’은 노화에 대한 거부감을 공략하는 성형문화를 비판하는 작품이다. 무대 위엔 은은한 색조의 카무플라주(Camouflage) 무늬로 덮인 침대와 링거, 의료용 기계가 있다. 무대는 마치 병원처럼 보이지만, 바닥에 깔린 카펫과 노트북은 이곳이 일상적 공간임을 암시한다. 무대 위 공간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에서 성형에 관련한 소식을 전하는 ‘뷰티 블로거(Beauty Blogger)’의 침실이다. 뷰티 블로거는 SNS에서 성형 관련 정보를 생산해 성형 산업의 성장에 일조했다. 작품에 사용된 카무플라주 무늬는 본래 군복의 위장을 위해 고안된 무늬로, 작가는 실질적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카무플라주 무늬로 성형 산업이 이뤄지는 공간을 덮었다. 이로써 성형 또한 외적 면모의 생존을 위해 노화를 가리는 위장이 됨을 표현했다. 작품에 사용된 화려한 색감은 통상 초록색과 갈색을 떠올리는 카무플라주 무늬와 정반대의 색조다. 이 작품에서 화려한 색조는 칼이나 주사기, 피처럼 성형과 연관된 폭력적 요소를 감추기 위한 장치다. 편안하고 안락한 서비스로 위장한 성형 산업이 사실은 노화를 금기시하는 부정적 고정관념 생산에 일조한다는 의도다.

전시는 노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을 개선하고자 한다. 에이징 월드의 영문 제목인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는 스웨덴의 사진작가 안네 올로프손의 작품명을 인용한 것이다. 해당 사진 속 여성들은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여성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면 피부에서  균열을 찾아볼 수 있다. 균열은 오래된 회화의 표면이나 피부 주름처럼 보인다. 사진의 모델이 된 여성들은 모두 40대로, 세월에 따른 신체 변화를 의식하기 시작한 상태다. 작가는 균열이 생긴 여성들의 얼굴엔 약간의 초조함과 불안이 서려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 불안은 작품의 제목처럼 노화가 내일의 사랑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데서 온다. 하지만 연 도슨트는 “피부는 나와 세상의 가장 가까운 경계선이다”며 “세상과 내가 교류하며 일어난 흔적이 피부에 나타난 것이 바로 주름이다”고 주름의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비틀었다. 이어 연 도슨트는 “오래된 그림의 갈라진 물감 자국을 자연스럽게 여기듯이 나이가 들어가는 신체도 긍정적인 의미로 수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본교 이영애 놀이치료학과 교수는 “신체 기능은 소실되지만 정신세계는 더 성숙해지는 과정을 노화라고 생각한다”며 “소실과 성숙의 간극을 잘 소화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노화를 현명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조언했다.


나이, 차별의 기준이 되다
노화를 향한 부정적 고정관념은 연령차별주의 문제로도 확장된다. 연령차별주의는 나이를 이유로 특정한 연령층을 차별하는 사상이나 태도를 의미한다. 노화 기피 현상은 이미 노화의 과정에 접어든 연령대에 영향을 미쳤다. 에이징 월드의 작품들은 사람들이 젊음을 벗어난 연령대에 가진 편견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관객들은 빈곤, 소외, 무기력으로 대표되는 노인의 이미지를 마주하고, 특정 연령을 지칭하는 차별적 표현을 마주하며 ‘연령차별주의’가 만들어진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박은태 작가의 연작 ‘늙은 기계 두 개의 시선’ 중 하나인 ‘아빠’는 낡아 고물이 된 기계와 지친 노인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기계와 노인은 모두 한때 산업 발전의 주역이었다는 과거를 공유한다. 기계 위에 엎드린 노인의 모습에선 쇠퇴한 노년층의 깊은 무력과 절망을 볼 수 있다. 작가는 노인을 회화 기법으로 그린 것과 달리 낡은 기계의 모습은 실제 사진으로 표현해 암담한 현실의 생생함을 살리기도 했다. 박 작가의 다른 작품 ‘가라뫼에서’는 앉아있는 노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노인은 어딘가에 앉아있지만 그림에는 배경이 없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근대화 시기 삶의 터전이 개발돼 도시로 밀려나 새로운 빈민층이 된 노년의 고독과 허무를 상징한다.

두 작품은 모두 사회·경제적으로 배제된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다. 관객이 작품을 통해 사회의 편견 속에서 노인이 겪는 고독과 빈곤, 소외를 깨닫게 하려는 의도다. 노년층 소외는 멀리 있는 일이 아니다. 한현(교육 15) 학우는 “아직 50대이신 부모님이 키오스크(Kiosk) 사용이나 개인 맞춤형 주문 매장을 낯설게 느낀다고 말해서 놀랐다”며 “노년층으로 접어들수록 젊음에 대한 소외감이 커지는 걸 체감했다”고 말했다.

오형근 작가의 작품 ‘아줌마’는 아줌마라는 단어에 함축된 사회적 편견을 돌아보게 한다. 전시장 벽면엔 아줌마들의 초상 사진이 줄지어있다. 아줌마는 원래 결혼한 중년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억척스럽다’ ‘주책스럽다’처럼 특정 계층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고정관념이 담겨 아줌마는 중년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작가는 진한 화장이나 과장된 표정 및 행동처럼 아줌마에 대한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노골적인 표현은 관람객이 아줌마에게 가진 부정적 편견을 폭로하는 장치기도 하다. 아줌마라는 단어에 내포된 여성 혐오도 지적된다. 한 학우는 “아줌마는 아저씨라는 단어와 같은 연령대를 의미한다”며 “하지만 개저씨처럼 다른 멸칭으로 바꿔 불러야 비로소 혐오 표현으로 들리는 아저씨와 달리 아줌마는 그 자체만으로도 비하 의미가 담길 때가 있어 한 단계 높은 혐오 표현 같다”고 비판했다.
노화는 삶의 본질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신체를 자본으로 규정해 젊음이나 매력이 사라진 신체의 가치를 평가절하한다. 에이징 월드는 ‘나이 듦’을 사회적 기준으로 재단하려는 시선에 정면으로 맞선다.


‘21g’은 1907년 미국의 의과학자 덩컨 맥두걸이 영혼의 무게에 대해 제시한 가설이다. 영혼의 존재를 믿었던 그는 생전과 사후 직후의 신체 무게를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영혼의 무게가 21g이라고 주장했다.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단 21g의 소실로 죽음이 결정된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삶의 방식을 돌이키는 계기가 돼줬다. 21g로 좌우되는 육신의 가치에 얽매이는 대신, 에이징 월드에서 노화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 바깥으로의 여행을 떠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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