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14일(월)이었다. 편집실에서 마감을 끝내고 다가오는 중간고사를 준비하던 중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청소년기를 함께 했던 f(x)의 설리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기사였다. 설리의 사망 소식은 순식간에 주요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장악했고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기사에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거부하고 싶었던 기사 속 글은 현실이 되었고 한 달가량 지난 11월 24일(일) 카라의 멤버 구하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둘은 생전에 수많은 가십거리에 휩싸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의 죽음엔 기자들의 역할도 있었다. 단순한 돈벌이를 위한, 또는 가십을 위한 기자들의 펜 놀림에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설리의 ‘희망의 끝자락’도 무너져 내렸다. 악플에 시달려 바깥출입조차 두려워하던 설리에게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이하 SNS)는 팬들과의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다. 그는 팬들에게 꾸밈없는 모습으로 다가갔지만, 사람들은 ‘관심의 표출인 악플을 연예인은 감수해야만 한다’라는, 자신도 이해시키지 못할 논리를 들이밀며 글로 돌을 던졌다. 수많은 사람이 악의로, 혹은 무심코 던진 돌에 던진 돌에 설리는 꽃다운 나이 25세에 삶을 끝맺었다. 

가식의 페르소나를 벗어 던진 설리에게 기자들은 비난을 일삼았다. 기사 링크 클릭 수가 곧 돈으로 변하는 것을 알고 있는 기자에게 설리의 SNS 사진은 먹잇감으로 전락했고, 왜곡된 진실은 삽시간에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기사를 쓴 사람 가운데는 기자가 아닌 일반인, 아르바이트생도 존재했다. 설리에게 돌을 던진 기자가 누구인지 찾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공개되는 글은 파급력이 대단하다. 언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수많은 핏자국이 남겨진 만큼 기자는 윤리의식이라는 무게를 견뎌야 한다. 기자는 자신의 페르소나가 아닌 ‘기자의 페르소나’로 오로지 진실만을 전달해야 한다. 언론이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든다면 기자는 곧 펜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가 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코로나19를 충분한 사실확인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지 화제성만을 중심으로 자극적인 기사를 내는 황색언론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모든 기자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긴 어렵다. 필자는 지난겨울 국내에서 손꼽히는 거대 신문사의 필사를 통해 일명 글의 ‘맛’을 봤다. 필자의 글은 여전히 부족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런 필자에게 오롯이 정기자의 글로만 채워지는 ‘막발간’은 두려운 존재다. 막발간까지 남은 횟수는 다섯 번뿐이다. 걱정을 거듭하다 보면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학보사 기자로서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선 두려움을 필자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용기를 갖는다면, 막막함을 이겨내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언젠가 빛을 발할 것을 확신한다. 다가오는 수습기자들과의 첫 조우를 무거운 마음으로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좋은 기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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