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에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제일 먼저 이름을 물어본다. 이름은 그를 기억할 수 있게 하고, 부를 수 있게 한다. 사건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사건을 부르고 기억할 수 있게 이름을 붙인다. 이 명칭은 대중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주로 언론에서 사건을 형식화하기 위해 만드는 경우가 많다. ‘미투(MeToo) 운동’의 경우 공중에서 먼저 만들어진 단어이며, 위의 신문 스크랩에 등장한 기사들은 후자의 경우다.

우리는 기사를 통해 ‘여성혐오’의 시각을 학습한다. 그 방법은 쉽다. 첫 번째, 사건을 접하기 전, 기사의 제목을 본다. 두 번째, 제목으로 사건의 주된 내용과 기사의 논조를 읽는다. 세 번째, 기사를 읽으며 제목에서 받은 인상을 굳힌다. ‘여성 범죄’를 다룬 기사의 경우, 제목에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명시함으로써, 피해자를 가시화한다. 화살을 받는 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다. ‘그러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피해자를 명시하지 않았잖아.’ 라는 의문을 갖는 이가 있다면, 필자는 수많은 여성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답변하겠다.

일례로 고유정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며, 기존 사건과 달리 가해자 이름, 그것도 본명으로 명명됐다. 반면 수많은 여성이 목숨을 잃어갈 때 세상은 조용했다. 가해자를 부르는 이름은 없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경우 가해자 이름이 밝혀지긴 했다. 이춘재. 하지만 사건의 이름은 아니다. 그는 ‘화성 그놈’으로 불리며 여전히 보호받고 있다. 숨어있다. 밝혀졌어도 아직 숨어있는 것이다. 위 두 사건 중 가해자 이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사건은 무엇일까.

이번 ‘n번방 사건’도 마찬가지다. n번방 사건은 지난 2018년부터 논란이 됐지만, 올해 3월이 돼서야 가해자가 특정됐고 공론화가 시작됐다. 이번에도 가해자는 모습을 감췄다. 이들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청원은 단기간에 20만 명을 넘겼다. 정부는 청원에 응답하여 가해자 보호를 멈추고 신상을 밝혀야 한다. ‘가해자에게 불리하다’, ‘가해자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말로 가해 세력을 옹호하지 않길 바란다. 가해자 보호는 여성에 대한 위협과 공포로 되돌아온다. 여성은 자신을 보호할 그 어떤 수단도 갖추지 못한 채 또다시 방에 갇혀야만 한다.

여성은 언제나 대상화된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쉽게 다뤄진다. 여러 사건에서, 특히 자극적인 범죄 기사에서 여성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싶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막론하고 범죄에서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여성이었다. 기사가 눈을 찌르는 순간, 사건은 언론의 의도대로 재구성된다. 기득권에 의해 사건을 보는 시각은 언제나 왜곡되고, 여성은 그 속에서 고통받는다.

기사에 찔린 당신,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한국어문 17 박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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