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권은 국민의 수치, 투표는 애국민의 의무’ 지난 1948년 실시된 5·10 총선거 포스터의 구호다. *선거의 4원칙을 지킨 국내 최초의 선거였던 5·10 총선거부터 지난 4월 15일(수) 시행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이르기까지 선거와 투표는 우리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이제 선거는 단순한 정치 행위를 넘어 개인의 일상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요소다.

지난 3월 24일(화)부터 오는 21일(일)까지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새일꾼 1948-2020: 여러분의 대표를 뽑아 국회로 보내시오(이하 새일꾼)’는 73년 선거 역사를 기록한 자료와 함께 선거를 재해석한 예술 작품을 전시한다. 전시는 총 5개 층에 조성됐으며, 층마다 ▶선거의 의미 ▶역대 선거 운동 기록 ▶부정 선거의 역사 ▶선거관리위원회 활동 ▶선거 관련 도서 및 영상 감상 등의 주제를 다룬다. 전시를 통해 선거의 역사와 마주한 관람객은 현재의 선거 문화를 돌아보고, 선거가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고찰한다.


선거 속 역사를 읽다
선거 포스터는 당시 정치 상황과 문화적 배경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이번 전시에선 대통령 선거 홍보 포스터와 역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등의 선거 포스터를 관람할 수 있다. 관람객은 선거 포스터에 사용된 어휘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다. 5·10 총선거 당시 선거 홍보 포스터와 제2대 국회의원 선거 포스터에선 ‘애국’이라는 단어가 강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당시 ‘애국심에서 우러나오는 성스러운 한 표’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박현주 일민미술관 도슨트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직후이기 때문에 애국 또는 애국자라는 슬로건이 사회 정서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1960년부터 1980년대까지의 선거 포스터는 주요한 정치 사건에 영향을 받았다. 3·15 부정 선거 이후의 선거 홍보 포스터엔 ‘공명 선거’라는 표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공명 선거는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를 이른다.

당시 사용됐던 선거 개표 도구에서도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과거엔 기표 용구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표’를 표기할 수 있는 모든 도구가 투표 도장으로 인정됐다. 박 도슨트는 “5·10 총선거 때는 대나무 도막을 도장처럼 썼다”며 “한국전쟁 이후엔 총알 탄피를 쉽게 구할 수 있어 탄피를 투표 도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투표용지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했다. 지난 1948년 제헌 국회의원선거부터 지난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전까진 문맹률이 높은 시대였다. 따라서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하는 현재와 달리 막대 기호를 사용해 후보자를 식별하도록 했다. 투표함의 변화로는 부정 선거가 공정 선거로 개선돼온 역사를 추측할 수 있다. 지난 1990년까지는 목재나 철제 투표함이 주로 사용됐다. 박 도슨트는 “초기의 투표함은 훼손이나 바꿔치기 등의 부정행위를 방지할 목적으로 튼튼하고 무겁게 만들어졌다”며 “공정한 선거가 당연시되며 부정행위의 우려가 사라지자 운반이 편리한 가벼운 투표함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투표함의 변화 배경을 짚었다.

부정 선거의 기록은 선거뿐만 아니라 국내 역사의 흐름도 보여준다. 사사오입 개헌이나 6·8 부정 선거 등 혼란했던 부정 선거의 역사는 모순적이게도 4·19 혁명 등으로 이어지며 민주주의 발전을 이끌었다. 정윤선 작가의 설치 작품 ‘광화문 체육관-부정의 추억’은 독재 정권의 도구로서 기능한 부정 선거를 비판한다. 정 작가는 전시장을 장충체육관과 막걸리 포차라는 두 장소로 꾸몄다. 두 장소 모두 부정 선거의 표상이라는 의의가 있다.

장충체육관은 이른바 ‘체육관 선거’가 벌어졌던 장소로, 해당 체육관에선 유신체제의 통치 기간 연장을 위한 비공개 선거가 치러졌다. 막걸리 포차는 선거 유세 기간에 대중에게 막걸리나 고무신과 같은 현물을 제공해 노골적으로 표와 맞바꾸던 ‘막걸리 선거’를 상징한다.

정 작가는 설치 작품 속에 인공지능 스피커를 배치하기도 했다. 관람객은 인공지능 스피커에 민주주의와 관련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이때 인공지능 스피커는 민주주의의 사전적 의미를 묻는 말엔 올바르게 답하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정의를 물으면 인공지능 스피커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했을 때 출력하는 기본 답변만을 재생한다. 부정 선거가 성행했던 당시 한국 사회엔 민주주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표현하려는 의도에서다. 박 도슨트는 “부정 선거가 이뤄진 장소를 체험한 관람객들에게 과거 및 현재 한국 사회 속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사유해볼 기회를 준다”고 작품 의도를 설명했다.

▲ 정윤선 작가의 설치 작품 ‘광화문 체육관-부정의 추억' 중 일부가 전시된 모습이다.


선거의 허상을 벗기다
새일꾼은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의 선거 문화를 돌아볼 수 있는 작품도 보여준다. 안규철 작가의 ‘69개의 약속’은 역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69개를 단색 회화로 전환한 작품이다. 후보자의 모습이 지워지고 선거 구호만 남은 포스터들은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애매한 색을 띠는데, 이는 각각의 벽보 속 다양한 색 조합에서 평균을 낸 색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포스터는 당시 민주통합당의 대표 색인 밝은 녹색을 사용했지만, 안 작가의 작품에서 재탄생한 해당 포스터의 색은 진한 갈색에 가깝다. 이제 선거 포스터에서 정치 색채를 구분할 수 있는 지표는 희미하게 남은 선거 구호뿐이다. 그마저도 뚜렷한 색을 나타내기보단 ‘○○한 대한민국’ ‘바꾸자’ ‘안정’ 등대체로 이상적인 미래를 바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이 작품은 선거에서 전략적으로 활용되는 이미지의 허상을 걷어내고자 했다. 관람객은 이 작품을 통해 기존의 정치색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각으로 선거 문화를 바라보게 된다.

선거 구호의 허상을 밝히는 작품도 전시됐다. 스튜디오 ‘일상의 실천’의 회화 작품 ‘이상국가: 유토피아’는 역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의 선거 포스터에서 추려낸 단어를 조합해 관람객이 가상 선거 포스터를 만들어볼 수 있도록 한다. 관람객은 ‘국민을’ ‘약속합니다’ ‘이제는’ 등 목판에 양각으로 조각된 400여 개의 단어를 자유롭게 조합한다. 완성된 선거 포스터는 실물로써 뚜렷한 실체를 가지지만, 실제로 포스터의 구호가 전망하는 미래는 관람객의 희망으로 완성된, ‘실체 없는 내일’이다. 이는 포스터 제작 활동에 참여한 관람객이 선거 구호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바라는 작가의 의도다.
 

▲ 일상의 실천 작가의 관객참여형 작품 ‘이상국가: 유토피아'가 전시됐다. 관람객은 목판 조각을 골라 선거 포스터를 만들 수 있다.


선거가 나아가야 할 이상적인 방향을 짚어주는 작품도 있다. 예술형 프로젝트 기업 ‘놀공’의 관객참여형 작품 ‘반드시 해내겠습니다!!!’는 현재까지 진행된 총 19번의 대통령 선거 투표를 다시 한번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단, 관람객에겐 이름과 정당을 제외한 후보자의 공약만이 공개된다. 투표권을 얻은 관람객은 자신의 정치 성향과 반대되는 선택을 하거나 이전에 투표했던 대상과 다른 후보자를 고르기도 한다. 어떤 공약이 자신에게 이로운지 판단하는 과정에서 관람객은 자신의 삶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투표에 참여하게 된다. 박 도슨트는 “이념과 이권 다툼에서 벗어나 온전히 유권자의 삶에만 집중하는 후보자 및 선거 문화가 활성화되길 바라는 의도를 가진 작품이다”고 말했다.
 

▲ 놀공의 관객참여형 작품 ‘반드시 해내겠습니다!!!'의 화면이다. 관람객은 후보자의 공약만을 보고 투표하게 된다.


소외 없는 선거를 향해
선거는 사회 주류 문화를 확인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새일꾼은 주류 사회 위주로 전개됐던 현재의 선거 방식에 의문을 던진다.

천경우 작가의 관객참여형 작품 ‘Listener’s Chair’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소통 방식을 고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둥글게 배치된 의자 위엔 녹음기와 헤드셋이 놓여 있다. 이 녹음기엔 익명의 시민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간이 녹음 부스에서 녹음한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겼다. 관람객은 한 번 의 자에 앉으면 3분 동안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할 의무를 진다. 익명의 목소리는 평범한 직장인일 수도, 취업 준비가 힘든 청년일 수도, 커밍아웃을 망설이는 성 소수자일 수도 있다. 박 도슨트는 “우리 사회에선 이따금 경청의 행위가 무시되곤 한다”며 “말할 자유와 들어줄 의무가 공존하는 것이 민주주의 소통 방식임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하늘 작가의 조각상 ‘한국몽’과 이동시 작가의 설치 작품 ‘동물당 **매니페스토’는 정치적 의사결정의 테두리 안으로 진입하는 소수자 집단을 표현했다. 한국몽은 미혼모, 난민, 외국인 노동자, 성 소수자 등 비주류 집단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장면을 그려 제작한 작품이다. 각각의 소수자성을 상징한 대형 조형물들은 당선을 뜻하는 꽃목걸이를 걸고 있다. 해당 작품에서 표현된 다양한 정체성과 인종으로 구성된 국회는 곧 소수자의 권리가 배척되지 않는 정치 사회를 상징한다. 동물당 매니페스토는 동물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사회를 상상해 종과 개체마다 그 크기에 맞는 기표소가 주어진 모습을 조형한 작품이다. 지금의 사회는 아직 주류와 기득권의 목소리가 강하다. 견고한 주류의 벽이 깨지고, 동물과 같은 비인간의 목소리마저 선거 과정에서 영향력을 가질만큼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는 선거에 참여하는 모든 유권자가 추구해야 할 미래다. 


최근 선거를 무거운 정치 행위보다 전 국민이 참여하는 정치 축제로 여기는 흐름도 생겨났다. 대나무와 탄피가 점 복(卜)자가 새겨진 만년 도장으로, 애국을 강조하던 선거 홍보 포스터가 사회관계망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에서 활발히 일어나는 투표 인증 릴레이로, 선거 및 투표 문화는 계속해서 변화해왔다. 선거는 사회 변화와 국민 인식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유동적인 문화다. 새일꾼을 관람하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을 선거와 미래 사회의 모습을 함께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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