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문화]

필자는 러시아 친구와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며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은 그와 러시아 민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가수 심수봉의 ‘백만 송이의 장미’가 러시아 민요란 걸 알게 됐다. 한국어로 개사된 가사는 슬픈 사랑이 담긴 원곡과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가 슬프게 느껴졌다. 개사 하더라도 원곡의 슬픈 느낌을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미, 이보다 강렬하게 사랑을 암시하는 꽃이 있을까. 아름답지만 가시를 가진 장미의 양면적인 모습은 사랑에 비유하기 가장 잘 어울린다. 필자는 ‘백만 송이의 장미’로 알려진 러시아 민요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민요는 실제 러시아에 살던 한 가난한 화가의 이야기로 한국에서 불린 노래와는 내용이 사뭇 다르다. 화가는 사랑에 빠진 여배우를 위해 자신의 그림, 집, 심지어는 자신의 피까지 모든 것을 끌어다가 판다. 그리고 세상을 덮을 만큼의 장미를 산다. 안타깝게도 화가와 여배우의 사랑은 결국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백만 송이의 장미는 둘의 사랑이 인생에 영원히 남아있음을 시사한다.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붉은 장미를. 창가에서, 창가에서, 창가에서 그대는 보느뇨. 사랑에 빠진, 사랑에 빠진, 사랑에 빠진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그대를 위해 꽃과 바꿔버렸거늘.

화가는 자신의 삶과 장미를 맞바꾼 무모한 사랑을 했다. 평생을 아등바등 일군 그의 인생은 잠깐 피었다 지는 꽃처럼 소모적인 것으로 남았다. 그의 인생이 꽃과 맞바꾸어 마땅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생을 전부 바칠 만큼 큰 사랑을 백만 송이의 꽃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인생과 맞바꾼 진심도 언젠간 그저 실낱같은 기억으로만 남을지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니 그의 인생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그의 인생은 사라져 가는 가치에 전부 쓰인 것 아닌가. 이 비극적인 결말이 사랑의 아름다움으로 포장돼도 마땅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순수한 사랑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덴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필자는 백만 송이의 꽃을 본 적이 없다. 누구든 이렇게 많은 꽃을 쉽게 줄 수도, 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필자가 가난한 화가의 사랑에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여전히 감동했던 건 바로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때론 무모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긴다. 그런 일들은 상식적이지 않기에 오히려 더 기억된다. 화가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장미가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건 아름다움과 아픔의 모순에서 온다. 가난한 화가가 보인 사랑의 아름다움도 자신의 마음 전부를 담보로 내 놓는 용기와 무모함의 불일치에서 오는 것 아닐까.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남들에 의해 평가되는 결과만이 전부가 아니다. 때론 무모하고 손해 보는 것만 같은 일도 누군가에겐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가치를 선사할지 모른다.

그러니 사랑한다면 사랑하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하라. 독자들도 화가처럼 자신의 선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용기를 실현하길 바란다.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내버리란게 아니다. 자신을 설레게 하는 것에 무모하게 뛰어드는 용기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그 이야기의 결말이 비극일지라도 말이다.

김보성 한국어문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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